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프 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의 발발과 동시에 [[빌헬름 2세]]는 퇴위했고 [[독일 제국]]은 붕괴되었다. 독일 제국의 뒤를 계승한 것은 중도좌익 계열인 [[사민당(독일)|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주도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그렇지만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권 수립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스파르타쿠스 봉기|공산 혁명을 시도]]했으며 정부 측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인 [[철모단]]과 [[자유군단]]을 동원하면서 독일 전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우익 세력이 신생 공화국에 우호적이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익 세력 중에서도 핵심이었으며 1차대전 발발 이후 사실상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공화국 체제를 내키지 않아했다.[* 일단 내각의 핵심 장관직은 모두 사민당이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 일단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군부는 정부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고 우파의 분노가 [[배후중상설]]로 더더욱 강화되면서 군부의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하지만 독일 전역에서 극좌 세력들의 봉기가 일어나던 판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우익 세력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는 핵폭탄이 외부에서 터졌다. '''바로 [[독일]]의 [[정규군]]을 10만 명 규모까지 축소하며 [[철모단]], [[자유군단]]을 비롯한 모든 [[준군사조직]]의 해산을 명령한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군부]]와 [[준군사조직]]의 수뇌부들은 당연히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반발했지만 국제 사회의 압력을 이길 수 없었던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와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는 1920년 2월 29일 대표적인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군단]]의 해산을 명령했다. 다음날인 3월 1일 자유군단은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퍼레이드]]를 베를린 근교에서 펼치면서 정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여기에 [[정규군]] 장성이자 [[자유군단]]의 지휘를 겸하고 있던 [[발터 폰 뤼트비츠]]가 퍼레이드 직후 행한 연설에서 '''"나는 이렇게 폭풍전야인 상황에서 주력 부대를 잃는 것을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Ich werde nicht dulden, dass mir eine solche Kerntruppe in einer so gewitterschwülen Zeit zerschlagen wird)"'''라는 발언을 남기면서 타오르는 불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었다. 당국의 지시를 대놓고 거부한 뤼트비츠의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고 실력 행사로 군부를 제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부랴부랴 정부 각료들과 뤼트비츠 사이의 협상 자리를 마련했다. 대통령 에베르트와 국방장관 노스케가 참가한 협상 자리에서 뤼트비츠는 '''즉각적인 [[의회 해산]]과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 실시, 자신을 정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할 것'''과 같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격분한 에베르트는 단칼에 그 조건을 거부하는 한편 뤼트비츠에게 정규군 장성에서 사퇴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한 뤼트비츠에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고(...) 협상 결렬과 동시에 뤼트비츠는 반란을 계획했다. 자유군단 내에서 가장 정예 병력 중 하나였던 에어하르트 해병여단(Marinebrigade Ehrhardt)이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프로이센 출신 [[극우]] 성향의 [[왕당파]]였던 [[볼프강 카프]]가 명목상 반란의 주도자 자리를 맡았다. 여기에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비롯해 군부 인사 중 상당수가 침묵이라는 형태로 반란 계획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마침내 3월 12일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의 지휘자인 [[헤르만 에어하르트]](Hermann Ehrhardt)가 자신의 해병여단에게 [[베를린]]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하면서 카프 폭동은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